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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관련 정보

기해예송과 갑인예송 이후 조선 정치 변화

by 디지털노마드 마케터 2025. 2. 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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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후기에는 예송(禮訟)이라 불리는 예법(喪禮) 논쟁이 발생하며, 붕당 정치의 갈등이 심화되었습니다. 대표적인 예송 사건으로는 기해예송(1659년)갑인예송(1674년)이 있으며, 두 사건을 통해 서인과 남인 간의 정치적 대립이 격화되었습니다. 기해예송과 갑인예송 이후 조선의 정치 구조는 붕당 간의 대립과 권력 다툼이 반복되는 형태로 변화하였으며, 왕권과 신권의 균형도 새로운 국면을 맞이하게 되었습니다. 본 글에서는 기해예송과 갑인예송의 배경과 전개 과정을 살펴보고, 이후 조선 정치가 어떻게 변화하였는지를 분석하고자 합니다.

기해예송과 갑인예송 이후 조선 정치 변화
기해예송과 갑인예송 이후 조선 정치 변화

기해예송의 배경

  • 효종 사망과 상복 논쟁: 1659년 효종이 승하하자, 그의 계모(継母) 자의대비(인조의 계비 조씨)의 상복 착용 기간을 두고 논쟁이 발생하였습니다.
  • 서인의 주장: 서인은 효종을 국왕(君)으로 보고, 자의대비가 아들의 죽음을 애도하는 기년복(朞年服, 1년복)을 입어야 한다고 주장하였습니다.
  • 남인의 주장: 남인은 효종을 장자로 보고, 자의대비가 3년복을 입어야 한다고 주장하였습니다.

기해예송의 전개

  • 서인의 승리: 현종은 서인의 의견을 받아들여 자의대비가 1년복을 입도록 결정하였으며, 남인은 정치적으로 위축되었습니다.
  • 남인 세력의 약화: 서인의 논리가 채택되면서 남인은 정치적으로 불리한 상황에 놓이게 되었습니다.

기해예송의 영향

  • 서인의 정치적 우위: 기해예송에서 승리한 서인은 정국을 주도하며 남인을 견제하는 정책을 강화하였습니다.
  • 붕당 갈등 심화: 서인과 남인 간의 대립이 더욱 격화되었으며, 이후 또 다른 예송 논쟁이 발생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기해예송은 서인의 정치적 승리로 끝났으며, 이후 남인의 반발과 붕당 정치의 심화를 초래하였습니다.

갑인예송(1674년)과 남인의 정치적 부활

갑인예송의 배경

  • 효종비(인선왕후) 사망: 1674년 효종의 왕비 인선왕후가 승하하자, 자의대비의 상복 착용 기간을 두고 다시 논쟁이 발생하였습니다.
  • 남인의 주장: 남인은 이번에는 자의대비가 3년복을 입어야 한다고 주장하며, 기존 기해예송 때의 결정을 번복하려 하였습니다.
  • 서인의 주장: 서인은 기해예송과 마찬가지로 1년복을 유지해야 한다고 주장하였습니다.

갑인예송의 전개

  • 남인의 승리: 현종은 이번에는 남인의 논리를 받아들여 자의대비가 3년복을 입도록 결정하였습니다.
  • 서인의 실각: 남인이 승리하면서 서인은 정치적으로 큰 타격을 입고 정권에서 밀려나게 되었습니다.

갑인예송의 영향

  • 남인의 정치적 부활: 남인은 정권을 장악하며 서인을 탄압하였으며, 이후 남인 주도의 정치가 전개되었습니다.
  • 붕당 정치의 변동: 기해예송과 반대로 남인이 승리하면서 조선의 정국이 급격히 변화하였습니다.

갑인예송에서 남인이 승리하면서 정치적 판세가 뒤집혔으며, 붕당 정치의 변동성이 더욱 심화되었습니다.

기해예송과 갑인예송 이후 조선 정치 변화

예송 이후 붕당 정치의 심화

  • 서인과 남인의 대립 격화: 기해예송과 갑인예송을 통해 서인과 남인의 갈등이 더욱 심각해졌으며, 붕당 간의 균형이 지속적으로 변동하였습니다.
  • 환국 정치의 시작: 예송 논쟁 이후 조선은 붕당 간 정권 교체가 빈번하게 일어나는 환국(換局) 정치 시대로 접어들었습니다.
  • 정국의 불안정: 한 붕당이 정권을 잡으면 상대 붕당을 탄압하는 형태가 반복되며, 정치적 숙청이 계속되었습니다.

예송 이후 왕권과 신권의 변화

  • 왕권 강화의 필요성 대두: 붕당 갈등이 격화되면서 왕권이 정치적 균형을 잡아야 하는 필요성이 증가하였습니다.
  • 숙종의 환국 정치: 숙종(1674~1720년)은 붕당 간의 갈등을 이용하여 정권을 교체하는 환국 정책을 적극적으로 활용하였습니다.
  • 탕평책(蕩平策)의 배경 형성: 예송 논쟁 이후 붕당 갈등이 심화되면서, 이후 영조와 정조가 탕평책을 추진하는 배경이 되었습니다.

기해예송과 갑인예송 비교

구분 기해예송 (1659년) 갑인예송 (1674년)
주요 논쟁 자의대비의 상복(1년 vs. 3년) 자의대비의 상복(1년 vs. 3년)
승리한 붕당 서인 남인
정치적 결과 서인의 정권 장악, 남인의 약화 남인의 정권 장악, 서인의 실각

결론

기해예송과 갑인예송은 단순한 예법 논쟁이 아니라 조선 정치의 붕당 대립을 심화시키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이후 붕당 간 정권 교체가 빈번해졌으며, 왕권과 신권의 균형이 계속 변화하게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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